일상적인 수다

갑의 사회? 을의 사회? 그냥 분노의 사회에 살고 있는 듯.

블랙커피원샷 2017. 10. 25. 18:15

 

오늘은 아이의 탐구발표대회 본선대회가 있는 날.

어쩌다 어젯밤에 평소의 수면 사이클을 놓쳐 3시간도 채 못 자고 아침을 맞았다.

아이의 대면심사 순서가 오전이라 서둘러 과학전시관에 가야 했다.

이런 대회에 갈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가 대회에 참가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참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많이 본다.

분명 아이가 참가하는 건데 아이는 멀찌감치 뒤에 서 있고 엄마가 다 세팅하고,

작품도 누가 봐도 어른이 만든 것, 게시용 설명서도 어른 말투,

아이에게 이러저러하게 발표하라고 가르쳐주고, "거기 서 봐."하며 사진 찍고...

이 탐구에서 아이의 몫은 앵무새처럼 외운 대로 한 발표뿐인 건 아닌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런 장면을 보는 것에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오늘도 역시 너무 불편해서 외면하고 마는 장면.

건물 밖에서 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바람이 조금 찬 날이라 햇빛이 내리쪼이는 곳에 계속 앉아있었더니

따뜻해서 좋긴 한데 어찌나 졸리던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2>를 읽고 있었는데 조느라 얼마 읽지 못했다.

비타민D만 넘치게 합성했을 듯...

순서가 맨마지막이라 제일 늦게 건물에서 나온 아이는 늘 그렇듯 덤덤했다.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와 함께 꼭 안아줄 수밖에...

7교시까지 수업이 있는 날이라

점심으로 쌀국수와 분짜를 함께 먹고는 바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러고 나는 바로 집으로 왔어야 했는데,

그러면 이후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살 것이 있어 집 근처 다이소에 들렀는데

계산을 하던 직원이 내 카드가 리더기에서 안 빠진다는 것이다.

좀 전에 점심 먹을 때까지도 쓰는 데 아무 문제 없었던 카드가 왜...

직원이 리더기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보더니 힘으로 카드를 뺐는데

그 과정에서 카드에 붙어있는 IC칩 가장자리가 조금 떨어져나갔다.

재발급 받아야 할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뭐지???

너무 피곤해서 몸은 이미 천근만근인데

여기서 바로 집으로 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그 직원이 망가뜨린 카드까지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면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하는 게

직원으로서의 태도가 아닌가?

이거 어떻게 할 거냐고 책임 추궁을 당할까봐 그러는 건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말을 아끼는 직원을 보며 짜증이 많이 났지만

뭐라고 하면 '갑질한다'고 할 것 같아 그게 더 듣기 싫어서 그냥 나왔다.

이 순간 누가 갑인 것인지...

잘못을 하고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안 하는 그 직원이 내가 보기엔 '갑'이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과조차 듣지 못하고 돌아선 내가 '을'이고...ㅠㅠ

 

카드 해결하러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진 은행에 갔다.

오늘따라 내 순서는 왜 이리 더디 오는지...

내 번호표의 번호가 전광판에 떠서 창구에 갔더니 나 말고 '고객님'이 한 사람 더 있다.

창구에서 자기 번호를 안 부르고 지나쳤다면서 자기 일 먼저 해결해 달라고

직원에게 당당히 말하는 그녀.

헐... 안 부르기는... 그 번호 조금 전에 전광판에 떴고 창구 직원이 부르기까지 했는데...

뻔히 자기가 놓쳐놓고서 남 탓 하는 걸 듣자니 또 짜증이 확...

오전까지 기분 좋았는데 오후에 무슨 액땜을 이렇게 연달아 하는지...ㅠㅠ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도 않고 싸우기는 더 싫어서

어이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창구 직원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번호를 건너뛰지는 않는다고,

번호가 전광판에 떴고 번호를 불렀는데도 안 와서 다음 순서로 넘어간 거라고,

창구가 여러 개인데 고객님이 한 창구만 바라보고 있다가 놓친 거라고

조리있게, 그러나 부드럽지는 않게 말하는 걸 듣자니 조금은 속이 시원해졌다.

그러면서 나한테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길래 OK 했다.

그 직원이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 고객님은 자기가 방금 한 게 '갑질'이라는 걸 알런지...

그 상황에서 나까지

"내 순서잖아요! 내 일부터 처리해 주세요!"하며 세게 나갔으면 어땠을까?

또 다른 '갑질'이겠지.

 

요즘은 사람들이 전부 다

요 만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사는 것 같다.

뭐가 잘못되면 무조건 남의 탓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자기가 책임을 쳐야 할 지도 모르니까 사과는 절대로 안 하고,

내가 모든 일에 있어서 최우선이니 양보도 절대로 안 하겠다고

매 순간 결심하고 또 결심하는 것 같다.

다들 '을'로 보일까봐 스스로 먼저 '갑'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작정하면 그 '척'을 한 방에 벗겨 버릴 수 있는데...

그러기엔 오늘 오후에 너무 피곤했고 기운이 없었다...ㅠㅠ

싸우면서 살기는 싫은데, 요즘 우리 사회는 다들 많이 화가 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살면 더 행복할까?

더 기쁘고, 마음이 더 많이 따뜻해지나?

오늘 만난 두 '갑'에게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