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국을 끓이는 동안...
냉동실 뒤쪽에서 한우 반골을 찾았다.
아마 마지막으로 먹고는 다음에 한 번 고아 먹을 분량만큼 남겨 넣어두었던 그것일 것이다.
채소가 저렴할 때에도 필요한 분량의 두 배쯤을 사서
당장 먹을 만큼 조리를 하고는 나머지를 잘 포장해 냉동실에 넣어두곤 한다.
겨울을 앞두고 여기저기 도토리를 숨겨두는 다람쥐마냥...
삶은 고사리, 가지, 시래기, 배추, 호박, 부추, 가끔은 두부도...
옷장만 한 냉장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냉장실이며 냉동실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 재료를 묵히는 일은 없다,
그것을 먹고 싶지 않아 묵힐 일은 있을지언정...
어제 초밥아저씨의 초밥을 포장해 와 저녁으로 먹으면서
이제 곰국을 한 번 해 먹을 때가 되었나 봐, 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저녁 공기가 선선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면서 동시에 냉동실에 넣어둔 한 봉지의 뼈들이 생각났다.
그게 꼬리였는지, 사골인지까지는 생각나지 않았는데,
오늘 오전에 꺼내어 보니 '한우 반골'이라는 이름표가 봉지에 매달려 있었다.
센 불에 한 번 푸르르 끓이고는 물 다 버리고 뼈도 깨끗이 씻어
다시 물을 부어 은근한 불에 고고 있다.
지금 2시간째...
아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 고면
고기 좀 넣어 저녁식사 때 먹일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흐뭇하기도 하고,
회색 구름 낮게 깔려 흐리고 으스스한 오후,
집안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안정되기도 한다.
어제 아이는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무사히 끝냈다.
아이는 그저 매학기 치른 기말고사일 뿐이었는지 담담해 했지만,
나는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탓인지
고맙고 대견해서 막 현관에 들어선 아이를 한참을 안고 있었다.
3년이 아니라 30년 같은, 정글같은 학교 생활이었다.
내가 겪은 고통은 아이가 겪은 것에 비하면 미미할 것이다.
그걸 생각할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만약 아이가
교내외에서 큰 상을 받는 일들이 없었다면,
성적이 꾸준히 이 만큼 나오지 않았다면,
서울대 영재원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버티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저런 정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간 아이가 고맙고 대견하면서도
안스러웠다.
그러면서 나는 과연 아이에게 든든한 울타리였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는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잊지 말기를... 나는 항상 네 편이야.
너만 편들기로 작정했어.
기억해 줘.
드디어 비가 내린다.
<2017. 11. 10 오후 7:17 추가>
비가 오는 데다가...
오랜만에 도서관에 다녀왔더니 기분이 업됐다.
나는 왜 도서관에만 가면 그 많은 책들이 다 내 것 같은지...
저녁식사용 국은 버섯들깨탕으로 준비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돈 메뉴기도 하고,
곰국은 뽀얗게 우러나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냉장고에서 하룻밤 재운 후 흰 기름을 걷어내고
두 번 더 고아서 먹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오늘 빗속에 하교한 아이에게 내민 간식은 따뜻한 생강차와 찐 옥수수.
찐 옥수수도 며칠 전부터 내 머릿속에서 떠돈 메뉴 중 하나였다.
여름에 쪄서 냉동실에 넣어두었었는데,
그 동안은 계속 마른 옥수수로 팝콘을 튀겨 먹느라 찐 옥수수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반골 꺼내면서 옥수수도 꺼내 데운 것이다.
반골 옆에 있던 밀폐용기에는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웬일인지 이름표가 달려있지 않았다.
'이렇게 불확실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애는 결국 나중에 버리게 되던데...' 싶어서
밀폐용기도 꺼내어 두었었다.
해동하면 정체를 알 수 있겠지, 하면서...
역시 반쯤 녹았을 때 보니, 닭육수였다.
나와 아이는 삶은 닭은 잘 먹지만 그 국물은 좋아하지 않아
닭을 삶을 때마다 국물은 따로 챙겨 냉동실에 넣어두곤 하는데,
그것이었던 것이다.
어쩌다 이름표를 안 달았는지...쩝...
얘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한 순간,
버섯들깨탕 기본국물로 딱이다 싶어서 잘 됐다고 생각했다.
닭육수에 다시마를 가늘게 썰어 넣어 감칠맛을 더하고,
끓이면서 대파 초록 부분 듬뿍, 굵게 채 썬 무 듬뿍, 버섯은 있는 대로 가늘게 찢어 넣었다.
싱거우면 나중에 소금을 넣을 요량으로 기본 간을 국간장으로 했는데,
국간장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막에 조금 덜어낸 국물에 들깨가루 많이 풀어 냄비에 부어
휘휘 저어가며 한번 포르르 끓인 후 불 껐다.
동부이촌동 청담의 버섯들깨탕, 담백한 맛이라 좋아하는데,
먹을 때마다 너무 적은 건지의 양과 묽은 농도가 아쉬웠었다.
그런데 건지는 듬뿍, 농도는 적당히 뻑뻑하게
딱 내 입맛에 맞는 버섯들깨탕을 드디어 끓인 것이다.
이제는 먹고 싶을 때마다 집에서 끓여 먹어야지~
남은 단 하나의 걱정은 '아이도 좋아해야 할 텐데...'다.
늦은 오수 중인 아이, 고기 많이 들어간 곰국 먹을 꿈을 꾸고 있으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