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퀀틴 블레이크:그의 그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로알드 달과의 협업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일러스트레이터 퀀틴 블레이크.
아이용으로 산 책들을 읽어서 나에게도 그의 그림이 낯익긴 하지만
사실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진 못했다.
그러다 보러 가게 된 그의 원화 전시...
언뜻 보면 대충 슥슥 그린 것 같은 선들, 그런데 그렇게 보기엔 너무 잘 그렸다.
안 그렸어야 하는 여분의 선이 없고 어색한 선이 없다.
그렇게 그가 그린 모든 선이 조화롭고 힘있어 보인다.
게다가 모든 캐릭터의 표정에 감정이 담겨 있고 잘 전달된다.
그렇다면 정말 고수 아닌가?
사용한 색감도 참 좋다.
어떤 색을 써도
연하게 한 번 스윽 칠한 것 같은데 선명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
채도가 낮은 색조차도 탁하지 않고 부드럽다.
이 정도면 색 사용에 있어서도 달인 아닌가?
그런데 그림들을 잘 보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수정하거나 덧붙인 흔적들...
이 그림도 물고기 저마다의 표정과 움직임이 다 살아있는 것이 신기해서 구석구석 보다가
왼쪽 윗부분에 종이를 덧댄 것을 발견했다.
퀀틴 블레이크 같은 대가가 귀찮아서 그랬을 리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저렇게 덧붙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자세히 보니 아랫쪽의 캐릭터는
덧붙인 데다가 수정액까지 사용해서 완성한 흔적이 있었다.
이 그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부만 다시 그려서 붙인 부분, 수정액으로 덮은 위에 다시 그린 부분이 있는 그림이
제법 있었다.
이 그림은 부분 부분 덧붙여서 한 장을 완성한 것이었다.
이 것에 대한 궁금증은
퀸틴 블레이크가 일러스트를 완성하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며 설명하는
10분짜리 영상을 보고 풀렸다.
아마 초안을 완성한 후 수정하는 과정에서 일러스트의 위치를 이동한 결과인 것 같다.
그 영상과 이 전시물을 보고 대충 슥 그린 것 같았던 선과 색 선택에 대한 궁금증도 풀렸다.
특히 이 전시물은
대충 그린 것 같았던 선과 색 뒤에 숨은 그의 예민한 선택과 노력을 조금은 알 수 있어
그의 그림들이 다시 보였다.
한 장의 그림을 위해 선 하나까지도 연습하는 그는
대가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가 사용했다는 펜과 수채화 붓은
손잡이의 나뭇결 속까지 색이 스며들어 있어
그의 노력과 열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그림책 한 권을 완성하기까지 그린 모든 그림을 모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는 것이 영상에 나왔는데,
그림책 한 장의 완성본이 나오기까지 다시 그리고 수정한 것이 수십 장이었다.
절대로 재능만으로 대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코끼리가 악어를 360도로 마구 휘두르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정말 창의적인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세히 보면 휘둘러지는 순간순간의 악어 얼굴에도 눈과 표정이 있고
몸통과 머리, 꼬리의 색이 다 다르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가 있는지...
그의 유머와 재치도 그가 사랑받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는 데 한 몫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코끼리 다리를 보다 보니 불쑥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얼마 전 '영재발굴단'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어린이 화가 겸 작가 전이수였다.
이 그림을 보니 더 전이수 작가의 그림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은 전이수 작가가 제주도의 미로공원 입구에 그렸던 벽화다.
물론 퀸틴 블레이크보다 섬세하거나 세련된 느낌은 덜 하지만
캐릭터의 표정이나 선에서 전이수 작가만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지 않은가?
전이수 작가의 다른 그림들을 봐도 그가 '될 성 부른 나무'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가 대가가 될 수 있도록 뒷받침을 잘 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영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터라
'영재발굴단'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았는데,
우연히 전이수, 이인후 두 화가의 이야기와 그림을 본 후 가끔 보게 되었다.
볼 때마다 바란다.
그 프로그램이 정말로 흙 속에 묻힌 재능을 캐내어주는 프로그램이 되면 좋겠다고.
어린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다르니까...
<달빛 아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가장 내 마음에 든 그림이다.
펜과 한 가지 색깔 물감으로 이토록 밤의 정취를 잘 표현할 수 있다니...
부족한 부분도 넘치는 부분도 없이 화면의 모든 부분이 조화롭다.
붓의 터치가 색깔 표현뿐만 아니라
짙고 옅음의 차이로 마치 다른 색 여러 개를 쓴 것 같은 느낌도 주고,
선을 대신해 사용된 느낌도 있다.
번짐을 잘 활용한 점도 정말 창의적이고...
황홀하면서도 신비로운, 그러면서 안온한 느낌이라
오래 바라보았다.
전시를 보러 간 1월 30일은 일기예보와는 달리 매운 바람이 남은 날이었다.
그러나 전시가 열리는 홍대 KT&G 상상마당까지 가며 본 얼음한강의 전경과
전시가 끝나고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흩날리기 시작한 눈송이 덕분에
전 과정이 다 좋았다.
그림을 보고 이렇게 들뜨고 행복했던 게 얼마만인지...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많은 것들이 느껴져서
머리와 마음이 동시에 행복했던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