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쟁이의 다락방

 

 

 '경성스캔들', 검색해 보니 벌써 10년도 더 전의 드라마였다. 그저 그런 사랑 이야기라고 짐작하고 보기 시작한 그 드라마를 나는 결국 마지막회까지 대사 하나하나 곱씹으며 아주 열심히 봤었다. 특히 마지막회의 맨마지막 부분에서 나온 이 글귀는 내게 관점의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가신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이 땅에서 마음껏 연애하고 마음껏 행복하십시오.'

 그렇다. 나는 일제강점기라 하면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느라 인간적인 감정은 뒤로 한 채 치열하게만 살았을 거라 생각했고, 일반 백성들은 암울한 정세의 눈치를 보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드라마를 보면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 모두가 지금의 우리처럼 생활 속 소소한 것에 기뻐하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해하기도 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도 사람이고, 장사꾼이나 종도 사람이니까...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감정이나 삶의 흐름은 다 거기서 거기일 텐데 왜 내 사고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갇혀있었는지... 심봉사가 눈을 뜬 마음이라고나 할까. 그 순간 '유레카~'라는 단어가 뒤통수를 탁 치고 지나가며 머릿속이 확 트였던 그 느낌은 잊을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래서 그 후 우리나라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 무렵의 역사와 관련된 사진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 시기를 다룬 책을 제법 깊이 찾아 읽기도 했다. 그랬기에 '경성스캔들'은 잊을 수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적어도 내겐.

 그 후로 비슷한 시기를 다룬 드라마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가곤 했다. '미스터 션사인'도 그래서 관심이 갔는데, 주인공을 맡은 연예인 중에 한 이름을 보곤 '안 봐!'하고 바로 마음을 접어버렸다. 부도덕한 언행으로 오랫동안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사람이라 얼굴만 봐도 그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작품 속 캐릭터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보지 않는 걸로 정리한 건데, 자꾸만 그 드라마가 괜찮다는 주변의 평이 귀에 들어왔다. 흠... 그래서 방학하자마자 한 번 봤는데, 역시나 관심 있는 시기가 배경인 드라마라 결국 처음부터 찾아가며 보게 되었다.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길이로 이야기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며 그 안에 비유적인 의미, 중의적인 역할까지 심어 작은 것도 놓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대사, 언어유희를 이용해 가벼움과 진중함의 조화가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작가의 대사들은 몇 번을 들어도 그 자체가 만찬이었다. 뭐, 이미 그녀의 전작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그래서 결국 끌려버렸지만...ㅠㅠ

 한결같이 쓸쓸함을 그 밑바닥에 깔고 있는 구동매와 유진초이의 눈빛도 좋고, 작가의 전작들에 등장했던 낯익은 얼굴들이 이야기 곳곳에 아이셔처럼 등장하는 것도 반갑고 새롭다. 고애신과 유진초이, 구동매의 대사가 마냥 무겁기만 하지 않은 점도 매력적이다. 방심한 채 넋 놓고 보고 있자면 여지없이 허를 찌르는 새콤한 대사가 하나씩 톡톡 튀어나와 큭~하고 웃게 만든다. 특히 가볍고 세속적인 듯하나 두뇌회전이 빠르고 영리한 미공사관 역관, 애신의 정혼자이면서 여기저기에 해피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니는 룸펜 김희성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모든 인물들이 다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지금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어 보이는 점도 기대감을 가지게 만든다. '경성스캔들'도 음악이 좋았는데 이 드라마 역시 음악이 드라마를 살리는 것 같다. 지금과 다른 개화기 무렵의 단어와 문장, 한글 표기, 고전적이면서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소품들, 이런 것들을 보고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렇게 결국 또 마지막회까지 이 드라마에 울고 웃으며 여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인물들의 대사가 웅얼웅얼 지나가버리는 게 많은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여러 번 반복해서 보라는 큰 그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역사적인 논란은 마지막회까지 다 본 후에 생각해 보는 걸로... 픽션의 범위 내에서 작가의 창의성이 발휘된 걸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일지는 끝까지 봐야 알 수 있으니까.

 날이 덥다. 일찍이 덥기 시작해 계속 더우니 큰 일이다. 길게 가지 않길 바랐는데... 30도 정도에서만 오락가락해도 좋으련만 몸 안의 온도나 바깥 온도나 그게 그거라 너무 처진다. 저혈압이라 여름 나기가 늘 힘겨운 것 같다...ㅠㅠ 해가 나지 않고 가끔 바람 한 자락 불어오는 지금 날씨만 같으면 좋겠는데...

 그 동안 덥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계획한 일들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는데 벌써 방학한지 일 주일쯤 지났다.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방학인데 이쯤에서 정신 좀 차려봐야겠다, 드라마를 비타민 삼아...

 

 

Posted by 블랙커피원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