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쟁이의 다락방

 

이 책의 소개글을 보고 단번에 떠오른 것은 호프 자런이 쓴 '랩 걸'이었다. 학자로서의 치열한 삶과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즐거움, 그리고 학문에 쏟는 열정을 자세하게 보여준 책이었다. 두께가 꽤 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학자로서의 순수한 열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빠져 앉은 자리에서 정신없이 독파했기에 열정의 전염성을 믿게 되기도 했다.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라는 이 책 역시 기린과 함께한 군지 메구라는 과학자의 열정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린을 유독 좋아했던 소녀 군지 메구가 18세에 평생 기린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한 뒤 기린 박사가 될 때까지의 기록을 담은 치열한 성장의 기록이다. 

군지 메구가 '기린의 제1흉추가 8번째 목뼈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 논문으로 제7회 일본학술진흥회 이큐시상을 수상한 만큼, 기린에 대한 해부학적 정보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보다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고 해서 이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다는 말을 미리 하고 싶고, 오히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기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에 대해 동경하게 될 거라는 말도 미리 하고 싶다.

 

이 책의 감수자는 '지식은 일상을 풍성하게 만들고 익숙한 것에 가치를 부여해 새로운 깨달음을 낳게 함으로써 일상을 빛나게 해 줍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동의하는 내용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자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10년 동안 30여 마리의 기린을 해부하며 기린의 8번째 목뼈 여부를 연구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기린의 사체가 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사체를 가지러 가고, 연구 주제의 해답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문에 대한 저자의 열정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학문을 하면서 저자가 느끼는 즐거움도 고스란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면 저렇게 끈기 있게 매달릴 수 있고 결국 찾기 원하던 바로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우주 물리학자로부터 '아인슈타인은 수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성공의 비결을 하나만 꼽으라 한다면 쭉 아이의 마음을 한 채 살았다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나도 군지씨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채 어른이 되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 생각한 내용을 적은 부분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겠다거나 이 세상을 구할 연구를 하겠다는 고상한 뜻을 품고서 연구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 그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였다. 내 인생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틀림없이 앞으로 노력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은 분명히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채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과 저자가 말한 '어린아이의 마음'이야말로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 지금 현재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하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루하루 그런 삶을 산다면 그 인생에 대해 성공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을 때마다 '기린이 죽지 않는다면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책을 읽는 것이 재미있었고, 이토록 몰입할 무언가를 찾은 것만으로도 그녀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인 부분 또 하나는, 저자가 지식을 익히는 즐거움과 위대함을 배운 것이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이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전업주부로 살면서 문화센터에서 향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해 저자가 기린 연구자로 성장한 15년 동안 향 만들기에 대해 공부해 지금은 조향사로 강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을 통해서 누군가 억지로 지식을 쑤셔 넣는 공부와 스스로 기꺼이 주체적으로 지식을 얻는 학문의 차이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연구자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기반을 다져준 사람은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저자의 어머니처럼 학문을 생활에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이유를 또 하나 얻었다. 

 

저자의 연구 주제와 연구 방법에 대해 아는 것이 이 책의 중심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 책에는 기린의 해부학적인 지식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렇게 그림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아무래도 번역서다 보니 문장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는데 그림을 참고하니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각 장의 마지막에 '재밌는 읽을거리'라는 부분이 있는데, 기린이라는 이름의 유래, 동물원에서 기린 종을 나누는 법과 같이 정보적인 내용도 있어 흥미있게 읽었다. 나중에 동물원에 가면 기린 몸의 무늬를 유심히 보게 될 것 같고 기린의 뿔이 몇 개인지도 관찰하게 될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거나 길을 개척해 주길 기다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힘들다며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갈 수밖에 없다.' 하는 각오를 다진 것이 연구자로서의 시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이 학문의 즐거움과 열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이전 단계로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가 먼저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을 한다면 즐거움도 얻고, 열정과 용기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저자처럼 말이다.

 

Posted by 블랙커피원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