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쟁이의 다락방

 

 

책을 받고 깜짝 놀랐다. 표지가 온통 꽃천지였다. 흔히들 말하는 몸빼, 시골 할머니들의 일바지 원단과 다를 바가 전혀 없어 보였다. 이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줄지는 몰랐다. 그런데 계속 보고 있으려니 좋았다.

 

 

정말 원단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어서 띠지를 벗기고 손으로 표지 앞 뒤를 쓸어보기까지 했다. 바탕색이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남색이라, 표지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길 이유가 충분했다.

 

 

표지를 넘기자 속지가 나왔는데 이것도 역시 꽃천지... 두 가지 색상의 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꽃밭이었다. 분위기는 표지와 확연히 달랐지만 속지는 속지대로 부드럽고 은은하게 예뻤다. 아직 내용은 읽지도 않았는데 이미 마음이 반 넘게 넘어가버렸다. '이건... 반칙이야...' 하는 중얼거림이 저절로 나왔다.

 

 

차례에서도 챕터별로 색을 다 달리 사용해서 구분을 짓고 있었다. 네 가지 색 모두 눈에 잘 들어오면서 튀지 않고 조화로워서 좋았다. 새 책을 읽을 때 디자인을 맡은 회사를 눈여겨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이 책은 예외다. 기억해 둘 생각이다. 

 

 

이 책은 맛집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보니 맛에 대한 이야기지만 객관적이고 묘사적이지 않고 다분히 주관적이고 서사적이다. 저자는 '들어가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작고 허름하고 낮게 엎드린 동네 식당들, 그 식당들을 오래 지킨 사람들, 그 사람들이 켜켜이 쌓아온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듣고 기록하고 나누는 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그 소사가 저에게는 대사였습니다. '할머니 식당'은 제게 우주입니다.'

그렇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각지에서 작고 허름한 식당을 운영하는 많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구성으로 실려있다. 겉모양만 봐서는 선뜻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는, 간판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그런 식당을 운영해서 자식들을 다 공부시키고 가족들을 건사한, 그 험난한 이야기들... 이 책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지도 않고, 손님이 너무 많이 오는 게 오히려 걱정되고, 마음에 맞는 손에게는 뭐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하신다. 그러고 보면 음식의 진짜 맛은 음식에 있는 게 아니라 그걸 먹는 분위기와 정에 있지 싶다. 전화가 너무 많이 오는 게 싫어서 간판의 전화번호 일부를 일부러 떼었다는 정회식당,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갓냉이동치미를 준다는 갓냉이국수, 신기한 모양의 일미만두, 저자가 책 곳곳에서 언급해서 읽는 내내 그 맛이 궁금했던 삼태기꽈배기 등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맛이나 가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책 내용 중 성원식품 어머니의 말씀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싼 걸 먹는다고 저렴한 사람이 아니야. 사람마다 가치가 있어." 이 책 곳곳엔 철학자의 명언 같은 할머니들의 말씀과 정신이 나타나 있는데, 모두 수십 년간의 노동으로 입증된 것들이어서 그런지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노동의 신성함이 담보된 말씀이니... 어쩌면 저자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이 많은 음식점들을 다닌 게 아니라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고파서 다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 하나하나가 정감이 있었다.

다른 사진들은 큼직하게 컬러로 실어놓으면서 주소, 전화번호, 영업시간, 메뉴 등 가게의 정보가 나와있는 'MEMO' 페이지는 사진도 글씨도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어서 뜻밖이었다. 알려는 주되 잘 알아볼 수 있게 알려주지는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인가 하는 의심이 들어 이게 광고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맨뒤 찾아보기 페이지에 지역별 할머니 식당에 대한 간단한 정보가 따로 나와있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웠는지...
이 혼돈의 코로나 시대가 종식되어 다시 이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때가 오면 이 책에 실린 할머니 식당들에 찾아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물씬 들었다. 저자처럼 곰살맞게 구는 성격이 못 되는 내게도 할머니들이 따뜻한 정을 베풀어주실지 정말 궁금하다. 그때까지 할머니들 모두 건강하시면 좋겠고, 계량이 필요 없는 그 손맛도 여전하면 좋겠다.
위로가 필요한 때에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제대로 된 책을 만나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Posted by 블랙커피원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