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쟁이의 다락방

지난 주 금요일에 전주 한옥마을에 다녀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가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그래서 이번 방학 동안 가 볼 계획이었는데

전국이 30도를 우습게 넘으면서 끓어오르니 일사병이라도 걸릴까봐 못 떠나고 있다가

더위가 약간 누그러진다는 일기예보를 보자마자 '내일 가자!' 하고는 나선 것이다.

오랫동안 생각하지만 일단 하기로 했으면 빠르게 추진하는 나다운 방식...

 

가격 대비 편안하고 시간 적게 걸리는 교통편으로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 선택,

구경할 곳은 한옥마을에만 집중하는 걸로...

일정은 역시 당일치기.

모든 떠남에서 가장 결정이 어려운 것이 잠잘 곳이다.

해서 대부분의 여행은 좀 무리를 해서라도 당일 내에 돌아오는 걸로 일정을 짠다.

여행만 가면 초능력자로 변신하는 '나'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

평소에는 나보다 더 체력이 좋은 아이가

여행만 가면 나보다 더 빨리 지쳐 하는 걸 볼 때 그런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

오전 9시 30분에 서울에서 떠났다가 밤 10시 50분에 돌아온 여행.

전주에 도착하기 전부터 내리던 비는

내내 더했다 덜했다 하다가 우리가전주를 떠나기 3시간 전에야 그쳤다.

그 덕분에 다음으로 미루려던 오목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나무가 울창해서 오목대에서는 한옥마을 전경을 볼 수 없었지만

오목대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본 한옥마을의 모습은 참으로 따스하고 정겨웠다.

밥 짓는 연기가 구수하게 퍼질 저녁 6시 무렵의 전경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전통 한옥은 아니지만

유적으로서의 한옥이 아닌 현재의 사람의 생기가 담긴, 살아있는 한옥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시시하다고도 하는 인천 차이나타운이 재미있었던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오래된 것에 담긴 사람의 생기를 느끼고 그것이 말없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재발견하며,

아울러

내 여행의 이유도 결국은 자신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식사시간을 빼고는 앉을 틈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내 방식의 여행.

그 덕분에 전주 한옥마을의 아주 좁은 골목도 다 지나가볼 수 있었고,

대여섯 번을 지나간 태조로의 가게들은 이름을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마치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인 것처럼...

그래서 그랬나, 이번에도 나에게 뭘 물어오는 관광객이 있었다.

어딜 가나 있는 일이므로 웃으면서 알려주는 걸로... 마치 그 동네 주민인 것처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역시 경기전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바로 전날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책을 다 읽고 온 터라

나도 어진박물관과 전주사고가 있는 경기전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내 발걸음을 도대체 뗄 수가 없도록 붙잡았던 곳은

최명희문학관이었다.

최명희 작가 일생의 역작이었던 <혼불>의 전체를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관 전체에 깊이 배어있는 그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매혹적이었다.

아이도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는지 빨리 다음 장소로 가자고 재촉하지 않아

우리는 한참동안 그녀가 쓴 문장을 읽고 또 읽고,

그녀가 썼다는 원고지 더미를 보고 또 보았다.

<혼불> 전체를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읽고나면 사서 두고두고 읽고 싶어질까봐 염려스럽다. 흠...

 

비싼 식사를 사 주지 못해 뒤늦게 아이에게 미안했다.

한옥마을이 아닌 다른 것들을 보러 전주에 한번 더 가기로 했으니 그때 꼭 사 주어야 겠다.

초능력자 엄마를 따라 다니느라 많이 힘들었는지 서울행 버스에서 내내 잔 아이.

그래도 1박 2일못지 않은, 2박 3일같은 여행이었다고 하는 걸 보면

알찬 여행이긴 했던 것 같다.

이번에 전주에 다녀오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는데,

멀미 심한 내가 시외버스를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멀미에 대한 공포를 까맣게 잊고 시외버스로 왕래를 한 건데,

신기하게도 오가는 내내 멀미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올라올 때 누가 그렇게 에어콘을 열심히 틀었는지 추워서 혼났다는...

문제는 다음날.

하루종일 두통이 심해 도대체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룻동안 신나게 돌아다닌 댓가를 아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비가 와서 우산 쓰고 돌아다니느라 불편하기도 했지만

전혀 덥지 않아 오히려 더 많이 돌아다닐 수 있었던 여행.

처음 가 본 전라도 지역이었는데

마치 서울 삼청동 부근을 돌아다니는 느낌이라

여유 부리다가 서울행 차 놓칠까봐 막판에 좀 조마조마했던 여행.

다음 번 전주행도 아마 당일치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전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를 것 같다.

그래서 또 다른 기대를 품게 만든 여행.

저녁 어스름인 지금, 바깥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노라니

마치 전주 어느 한옥 처마밑에서 낙숫물을 바라보는 것 같아 마음이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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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블랙커피원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