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쟁이의 다락방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라는 드라마가 이도우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원작 소설의 내용을 검색해봤었다. 1회와 2회를 보고 나니 드라마에서 앞으로 펼쳐질 내용이 궁금해서였다. 과연 해원과 은섭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해원의 이모는 왜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지, 해원의 어머니는 왜 남편을 죽였는지, 은섭은 왜 산에 남다르게 익숙한지 궁금한 게 많았다. 이쯤 되면 차라리 책을 후다닥 읽는 게 더 낫겠다 싶었으나, 언젠가부터 나는 소설책은 사지 않는다. 나를 홀릴 만한 소설책을 찾아 늘 기웃거렸으나 찾지 못했고, 그래서 소설책을 사지 않은지 한참 됐다. 내용이 궁금한 소설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곤 했다. 그러고 나서 소장하고 싶어지면 살 생각이었는데, 책욕심 많은 내게 그런 욕구를 불러 일으킨 소설은 한참 동안 없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변수가 됐다. 도서관이 장기휴관에 들어가면서 책을 빌릴 수 없게 되었는데, 내용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사기는 싫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전자도서관이었다. 문제는 전자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의 종류가 많지 않다는 것. '날씨가...'는 없고 이도우 작가가가 쓴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라는 소설만 있었다. 안 그래도 이도우 작가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많이 본 글이 '날씨가...'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게 '사서함...'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바로 대출하고는 읽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 먹은 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밤이 깊어가도 뒤의 내용이 궁금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잡으면 결국 끝을 보고야 마는 성향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성향 때문에 소설책을 쉽게 손에 잡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 동안 내 현실에는 소설책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하니까... 결국 밤을 새워가며 읽은 끝에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서야 잠들었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공진솔의 오랜 습관을 보고 이미 내 마음은 진솔에게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일이 손에 안 잡히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 연필 몇 자루를 깎는 습관은 내게도 오래된 습관이라... 그것말고도 긴 종로 거리를 걸어 교보문고에 도착해서는 아픈 다리를 쉬어간다는 개념으로 오래 책을 읽곤 한 청춘시절의 이야기도... 시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생각도... '어쩌면 이 여자는 '나'일지도 모르겠구나.'하는 생각으로 계속 읽게 되었다. 세상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무의식적인 끌림이었다.

'비죽거렸다, 민숭민숭하네, 거치적거리다, 피식 실소했다,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나왔더니 복장도 헐렁하고, 도 닦는 사람처럼 헐렁헐렁, 입가에 미소가 묻은 채로' 등 흔하게 볼 수 없는 단어를 접한 반가운 느낌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이 함께 쓰여 오히려 빛을 발하는 데서 오는 신선한 느낌,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질 정도로 상황과 대상을 구체적이면서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서술 방식, 인물이 머릿속으로 생각하거나 혼자 읊조렸을 법한 문장까지도 서술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여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세련됨 이 모든 것이 차분하지만 힘 있게 느껴졌다. 앞 부분을 어느 정도 읽었을 때 이미 '아... 이 작가는 이 이야기를 깔끔하게 잘 마무리 짓겠구나.'하는 믿음이 갔다.

처음엔 뭐든 가볍게 여기고 멋대로 행동하는 한량 같아 보였으나 100%의 진정성을 가지고 사랑 앞에 섰던 남자 이건, 그의 군대 시절 이야기로 인해 '양떼같이'의 새로운 쓰임을 알았다.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다가 결국 도망을 선택한 진솔의 마음을 돌린 그의 진정성, 자신의 마음을 용기 있게 직시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인생에서 달아나지 말라고 말하는 그의 용기는 잔잔하지만 뜨거웠다. 매사에 심드렁하게 보였지만 적어도 자신의 현재의 삶에 대해서는 진솔하고 열정적이었으니까... 그의 모습에서 그의 할아버지 이필관의 모습도 보이는 것도 재미있었다. 호탕하고 자유분방하게 산 것처럼 보였지만 그 분도 매순간 자신을 들여다 보고 뜨겁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주춤거리는 진솔의 마음을 잡아 이건에게 건네준 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새 이야기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이 때는 진솔이 이런 표정을 지었겠구나, 이 장면에서는 이건이 이렇게 행동했겠구나 하며 저절로 머릿속에서 드라마로 바꿔 상영하게 만드는 것도 이도우 작가의 필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다. 이래서 그 많은 서평에서 오랜만에 마음을 설레게 만든 소설이라는 찬사가 쏟아졌구나, 나도 저절로 이해 당하고 말았다. 인물의 정서를 이토록 따뜻하게, 그러면서 섬세하게 표현하니 저절로 빠져들 수밖에...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도 아마 그럴 것이다. 매 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보게 되겠지. 기대가 된다.

이틀 동안 이 작품을 읽으면서 현실에서 쌓인 불안감과 초조함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설렘이 가진 치유의 능력이고, 소설이 가진 힘이 아닐까. 이도우, 그녀의 작품 안에서 이틀 동안 잘 놀았다.

 

 

 

Posted by 블랙커피원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