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위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실감하던 여름이었다. 여행을 가자는 말은 방학을 시작하자마자부터 했건만 계속 더웠고, 떠나지 못한 채 시간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작정하고 날을 잡아 부여, 공주 여행계획을 세웠고, 다음 날 아침 바로 떠났다.
다행이었던 건 그날이 내내 구름 낀 날씨였다는 것. 그 덕분에 더위 걱정 없이 부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건 부여에 도착하기 직전과 부여를 떠난 직후에 비가 왔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를 마중하고 배웅하듯이... 비로 인한 맑고 시원한 공기는 마음껏 들이마시고 젖을 일은 없어 더 그런 생각을 한 지도... 자, 그럼 출발~
서울에서 부여까지는 고속버스로 2시간. 버스는 모두 우등버스라 좌석의 간격이 넓었고, 평일이라 버스에 승객도 몇 명 없어서 미안해 할 필요 없이 좌석을 젖히고 다리를 뻗어 누워도 되어 좋았다. 에어컨이 너무 세서 추위에 덜덜 떨며 가야 했다는 게 제일 큰 흠이었다는...
게다가 마침 부여의 백제 관련 문화유산들이 유네스코의 등재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부여의 모든 박물관과 문화재 입장료가 무료. 우리의 여행에 날개를 달아줄 조건들이 줄줄이 이어졌던, 그래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행이었달까...

정림사지 오층석탑. 사실 나는 이것 하나를 보러 부여에 갔다.
백제문화권 지역에 가 보고 싶었기에 처음에는 공주를 갈 작정이었다. 부여보다는 가까워 오가는 데 시간이 덜 걸리니까... 그런데 공주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검색을 하다보니 공주에서 부여가 매우 가까웠고, 부여까지 같이 보자니 하루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 결단이 필요했다. 아이는 부여가 더 볼 것이 많으니 부여를 가자고 했다. 나는 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직접 보고 싶어서 아이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바로 옆에 있는 정림사지 박물관에 먼저 들렀는데, 전시물들이 알차고 설명이 충실해서 먼저 둘러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은 실제로 보니 경주의 첨성대보다 크기가 더 큰 것 같았다. 책에서 보던 오층석탑은 작고 아담한 느낌이었는데, 눈 앞의 오층석탑은 기골이 장대한 남자같았다. 박물관 앞에서만 봐도 탑이 주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그 남성미에 놀라 한참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는... 그러나 찬찬히 보니 궁궐의 처마끝처럼 살짝 위로 향한 탑의 선이 참으로 곱고도 유려해 보였다. 복잡한 꾸밈이 있지는 않았지만 선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끌 만했다. 탑 주위를 돌며 탑을 구경하는 동안, 저 돌에 담긴 세월이 얼마야 하는 생각에 마치 타임머신을 본 것 같았다.

부여박물관은 부여에서 꼭 둘러보라고 추천하고픈 장소다. 모두들 저 금동대향로를 보러 가겠지만, 다른 유물들도 볼 만한 게 많았고 단층으로 지어 나지막하고 환하고 넓고 낮은 로비는 백제시대 당시로 돌아가 그때의 햇살을 맞고 있는 것 같은 느낌까지 주었다. 평온함... 가슴 저 밑바닥부터 차올라오는 평온함이 느껴져서 로비의 의자에서 벌렁 누워 쉬다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궁남지에 가야 했고 점심도 먹어야 했기에 시간을 아껴야 했다.

내가 부여박물관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연꽃구름무늬벽돌'이었다. 아름답고 우아하여 자꾸 눈길이 갔다. 어찌 보면 문화적인 수준과 깊이는 지금보다 그때가 더 나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관람하는 동안 전시된 유물들로 퍼즐 맞추듯 백제시대 부여의 풍경을 상상하며 완성해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 당시에도 참으로 평온하고 품위 있는 도시였을 것 같다.

궁남지는 놀랍게도 끝없이 펼쳐진 연잎으로 꽉 차 있었다. 연꽃축제는 끝났다고 하는데, 무성한 연잎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8월에 개화한다는 종의 연꽃들이 군데군데 활짝 피어있어서 눈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저 연잎 숲을 탐방(?)할 수 있게 연못 안에 징검다리로 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가문 여름이라 연못 물의 깊이도 낮았다. 행여 실수로 빠져도 겁나지 않을 것 같아 용감하게 우리도 그 징검다리를 따라 밟으며 연잎 숲을 한 바퀴 헤집고 돌았다. 연못 주위를 따라 걷자니 연못이 어찌나 큰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백제시대 별궁의 연못이었다니, 궁은 그럼 도대체 얼마나 컸다는 건지...

아름다운 연꽃 봉오리... 그러나 얼마나 큰지 아이 얼굴만 해서 가까이서 보면 조금 무섭기도 했다. 마치 거인국에 와 있는 소인이 된 느낌이랄까. 연못 주위를 한 바퀴 다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미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배가 매우 고팠다.
점심은 계획했던 대로 연잎밥 전문점에서 먹기로 했다. 궁남지 주변의 음식점이 다 연잎밥 전문점들이어서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이서 고르면 되었다. 연잎밥 관련 메뉴 너댓 가지만 파는 음식점이 믿을 만해 보여 들어갔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연잎밥도 맛있었고, 다른 음식들도 간이 적당하고 양도 많아 배를 두드리며 먹었다. 결국 배를 꺼뜨리기 위해 또 걸을 수밖에...

낙화암까지 올라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낙화암과 부소산성보다는 백마강을 선택했다. 올 때 보니 백마강의 전경이 인상적이었기에... 한강이 풀메이크업한 여성과 같다면 백마강은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 수수하지만 그래서 더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풍겨나오는 여성의 얼굴 같았다.
부소산성은 아랫쪽만 살짝 둘러보고 서문으로 나와 백마강으로 갔다. 막상 부소산성에 가 보니 그렇게만 둘러보고 가기에 아까웠다. 나무가 울창하여 올라가는 길이 시원했고, 낙화암에서 볼 백마강의 전경을 못 보고 가는 것이 서운했다. 하지만 이렇게 부여에 한 번 더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남겨놓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백마강 강둑에 올라섰을 때 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먼저 맞이했다. 그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벤치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겹겹이 보이는 먼 산의 능선과 잔잔한 강의 모습은 그대로 기억속에 담고 싶은 그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아이는 황포돛배를 타고 싶어 했는데, 노를 저어 타는 옛 방식이 아니라 한강유람선 같은 배여서 이 역시 다음에 오면 타는 걸로 미루어 두었다. 사실 나는 저걸 꼭 타야 하나 싶었다는... 강둑 위에서 보는 풍경이 더 멋졌다.

부여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갈 때보다는 차가 많았고, 비가 내리기도 해서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걸린 시간은 1시간 50분쯤. 아이는 부여를 출발하자마자 바로 고개를 꺾고 잠들었다. 식사 때를 빼고는 하루종일 걸었으니 무척 힘들었을 것 같다. 딱 내 식대로의 여행이라 나는 좋았는데... 미안했다. 그래도 경주나 부여나 이렇게 작은 도시 안에 오밀조밀하게 문화재가 모여있는 곳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걸으면서 천천히 보다보면 그 시대를 오롯이 느낄 수 있어 감동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해외여행을 가도 이 방식을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서울에 도착한 게 8시. 아직 환함이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라는 말을 실감한 날이었다. 한 도시를 돌아다니며 볼 것 다 보고 왔는데도 해가 지지 않았다는... 이래서 우리의 당일치기 여행은 앞으로도 짬짬이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