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쟁이의 다락방

 

지지난주에 동네 채소가게에서 채소와 과일들을 조금 사고, 지난 주에 인터넷으로 여러 종류의 가공식품들을 배송 받고 나니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었더랬다. 그래도 2주 동안 현관문 밖에 한 번도 안 나갔는데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면 좀 이상하게 보일라나? 교회도 TV로 예배 드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KFC의 감자튀김, 내가 좋아하는 KFC의 비스켓도 집에서 만들어 먹고, 식소다를 구입해서 뽑기도 만들어 아이와 추억을 공유했다는... 도토리묵도 집에서 쑤어 볼 요량으로 가루를 사 놓았다. 이래저래 나의 집순이 실력이 만렙이라는 것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어제 마지막 사과를 먹고 나니 과일이 떨어졌다. 냉장고의 채소칸도 바닥이 드러났다. 장 보러 갈 때가 된 것이다. 하도 외출을 안 했더니 어느 정도 두께의 옷을 입어야 할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지난 며칠 동안은 소리만으로도 그 세기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무섭게 바람이 불어 창을 열지 못했는데, 오늘 창을 열어보니 바깥은 완연한 봄날이었다. 계절의 손짓이 느껴지는 날씨라니... 이러니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돌아다니는구나. 

하지만 우리의 외출 시간을 결정한 것은 계절의 유혹이 아니라 밤하늘의 금성이었다. 어제와 오늘이 지구와 금성의 거리가 가까워져 금성이 가장 밝게 보일 때라는 인터넷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해질녘쯤 동네 시장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고, 금성이 평소보다 얼마나 더 반짝거리는지 밤하늘을 보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단 길에 발을 디디자 조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해가 지고 있어 조금 서늘했으나 걷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드는 날씨였다.

먼저 아이와 동네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마스크를 했지만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되었다. 뉴스에서 염려하는 대로 큰 길가의 술집은 빈 자리가 없었다. 퇴근 시간이긴 하지만 주말도 아닌데, 게다가 마스크도 없이... 어느 음식점 앞에는 다닥다닥 붙어 선 사람들의 대기줄도 보였고, 길에서도 삼삼오오 취한 채 모여 선 직장인들을 제법 볼 수 있었다. 큰 놀이터에는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로 시끄러웠다.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지만 이해가 되지는 않는 일. 다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알아서 끝낸 분위기였다. 이래서 질병본부에서 이번 주가 고비라고 했나 보다.

계획대로 산책의 끝은 동네 시장에 있는 마트였다. 나는 채소들을 담고, 아이는 간식거리들을 골랐다. 과일은 신선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지 못했다. 이번 주에 한 번 더 나와서 과일만 따로 사야 할 것 같다. 오이를 많이 팔고 있어서 오이 10개를 담고, 딱 한 단 남아 있는 부추도 집었다. 적어간 리스트대로 집었더니 가지고 간 두 개의 장바구니가 금방 가득찼다. 

저녁 어스름의 속도는 빠르다. 해가 졌나 싶으면 금세 어둠이 몰려온다. 돌아오는 길, 어두워진 하늘에서 금성을 찾아보았다. 가는 초생달 바로 곁에서 달못지 않은 밝기로 맹렬하게 반짝이는 별이 바로 눈에 띄었기 때문에 달을 보니 그냥 바로 보였다. 아, 네가 금성이구나. 예뻤다. 기사 내용처럼 금성도 초생달 모양인지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빛만큼은 평소보다 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별은 겨울에만 밝게 보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반짝이는 금성을 아이와 한참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집에 들어와서는 오늘 사 온 시래기로 시래기된장국을 끓이고, 오이부추김치를 담았다. 오랜만에 코로나 사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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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든 생각 중 지금 가장 마음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겠다.'

이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은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7화 속 몇 장면이었다. 의사 5인방 중 이익준이 삶을 포기하려는 환자에게 자신의 이혼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 양석형의  어머니가 상간녀와 남편에게 구정물과 걸레를 끼얹는 장면, 안치홍이 뇌수술 중인 환자에게 담담하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하는 장면...

나이가 들수록 감당해야 하는 일의 폭이 점점 넓어지는 것 같다. 어떤 때에는 나한테 왜 이런 일까지 생기나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아직도 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했다. 답을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하면서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게 삶인 걸까? 다들 그렇게 안개를 헤치며 나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나만 이렇게 사나? 그렇담 너무 억울한데... 왜 나만? 시간이 갈수록 크고 작은 물음표만 많아지고 있다. 요 며칠동안은 그 물음표가 화살이 되어 나에게 꽂혀 많이 아팠다.

그래도 오늘은 드라마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내 마음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은 덕분인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연약하다는 걸 너는 모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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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 자신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는 점이 있다.

나는 참 예민하구나...ㅠㅠ 그 동안 일터에서 내가 많이 들은 평은 세심하다, 정확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데에 세심해서 새 사람에 대한 적응력이나 대인관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업무를 정확하게 처리해서 실수나 오류가 없다는 것. 내 예민함이 가장 긍정적으로 발현된 곳이 바로 일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생활에서 마냥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나 소리가 나면 그 원인을 찾을 때까지 계속 신경이 쓰인다.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 해결될 때까지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이다. 심하면 몸에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하루 내내 편두통으로 고생하고 나니, 나의 예민함은 소심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날. 목소리 크고 뻔뻔한 사람이라면 어차피 내 일이 아니라고 바로 잊고 지낼 일이었는데 난 왜 일 주일이 넘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사서 걱정하고 있는지...ㅠㅠ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지 스스로에 대해 우울했던 날이었다.

구름 낀 날이 있으면, 그 구름이 걷힌 후 다시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 법. 자연스레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노력하고 있다. 하루하루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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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일기를 쓰지 않았다.

오늘이 어제와 같은 날이 반복되고 있었고 난 그 밋밋함이 지루한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데, 언론에서는 자꾸 '집 안에만 있어서 힘들죠?'를 세뇌하고 싶은 듯 반복하고 있어서 그에 반대되는 내 의견을 여기에 드러내도 되나 싶은 게 첫 번째 이유였다. 쓰고 싶은 내용을 미뤄두고 누군가를 의식하고 쓴다면 그건 일기가 아니니까.

두 번째 이유는 실생활에 충실하고 싶어서였다.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고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니까.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젖혀두고 클릭 두 번에 없어질 온라인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쓰고 싶지 않으면 안 쓰는 게 맞고, 그저 내 우선 순위에 충실하게 살고 싶었다. 아이의 개학 예정일이 다가오고 있었다가 일 주일을 남겨놓고 온라인 개학을 하겠다는 발표가 났다. 발표 후 학교로부터 그 준비에 대한 안내가 휴대폰으로 계속 왔고, 학교 홈페이지에도 계속 올라왔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의 문자도 계속... 개학이 여러 번 연기되면서 학교에서 하라고 내 준 과제의 양을 봤을 때 차라리 등교하는 게 낫겠다 하면서 든 생각이 '학교는 왜 이렇게 뭘 하라고 요구하기만 하나?'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가장 효율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하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세 번째 이유가 가장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틀 반 동안 아팠다. 역시나 편두통과 오한. 약도 안 듣고, 혈자리 자극도 별 효력이 없었다. 아무것도 효과 없는 것 보니 앓아야 낫는구나 싶어서 그저 몸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편두통이 심하니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기 못했고 한기가 느껴져서 자기만 했는데, 자면서도 머리는 계속 아팠다. 드문드문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잠깐 통증이 가라앉은 동안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틀 반이 지난 아침, 일어나보니 몸이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 숨이... 

앓고 나서 코로나 사태 동안 한 번도 가지 못한 미용실을 다녀왔다. 더이상 머리를 기르기가 힘든데,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으니까 상황이 급변하기 전에 다녀오자는 마음이었다. 그건 미용실에 가야 하는 내 이유고, 온라인이라도 개학은 개학이니 아이 머리도 미용실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네 토박이에 건물주인 미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이 동네에서도 확진자가 몇 명 나와서 확진자가 들른 몇몇 가게가 2주 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는 것, 확진자 중 한 명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문을 닫는 중인 가게 중 하나는 내가 채소 사러 자주 들르던 곳이어서 이 사태의 엄중함이 마음에 확 와 닿았다. 그 가게에 안 간지 1주일이 넘어 모르고 있었나 보다. 동네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더 모를 수밖에... 동네 동향에 깜깜인 나는 이렇게 미용실에 갈 때마다 미용사로부터 동네 이야기를 속속들이 듣는다. 잘 들어주는 성향이 빛을 발하는 셈인데, 다행히 듣고 나면 도움이 되는 것도 있어 재미있게 듣고 있다.

오늘은 내게 아주 특별한 날이다. 아이의 생일. 늘 일더미에 눌려 사느라 생일상을 제대로 차려주지 못한 게 도대체 몇 번인지 모르겠다. 올해는 시간도 있으니 그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 어제 장도 보고 오후 내내 주방에 서서 쇠고기미역국부터 잡채, 오이무침, 연어구이 등 아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생일상을 준비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겉절이가 오늘 딱 도착한 것도 생일상에 한 몫 했다. 겉절이, 아이가 좋아하는 건데, 다행히 맛도 있었다. 생일 노래 불러준 후 촛불도 끄게 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는 말도 함께... 그건 평소 아이를 향한 내 눈빛에 늘 담겨있던 말이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새삼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아이와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누고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진심은 그때그때 전해야 한다는 것. 오늘 그걸 실천한 것이다. 아이는 어색해 했지만, 나는 앞으로도 죽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로 내 진심을 전해 볼 생각이다. 

이번 주 들어 확진자 수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치료 중인 환자 수를 생각하면 31번 환자가 나오기 전으로 돌아가려면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신경 끄고, 나는 그저 내 일상을 잘 살아가는 게 흘러가는 시간이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일 것이다. 

좋은 날이 갔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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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다이알비누는 추억이다. 

얼마 전에 이마트에서 다이알비누 묶음을 저렴하게 파는 걸 보고 반가운 마음에 덥썩 사 온 적이 있다. 집에 돌아와 욕실용품 넣어두는 장을 열었더니, 한 눈에 딱 들어오는 다이알비누 묶음 하나. 그렇다. 며칠 전에도 난 똑같이 반가운 마음에 같은 비누를 사 오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덕분에 졸지에 비누 부자가 되어버렸는데...

이미 쓰고 있는 비누를 다 쓰고 다이알비누를 쓰려고 마음 먹었는데, 기회가 금방 오지 않았다. 욕실용품 장이 끊임없이 비누를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비합리적인 의심이 들기까지... 그러다가 오늘 새 비누를 꺼내야 할 때가 되어 장을 열었더니 올레~ 드디어 쓰던 비누가 다 떨어졌다. 다이알비누를 꺼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신나게 다이알비누 하나를 가져와 비누 트레이에 놓았다. 아... 이 냄새... 내게 '비누 냄새'라고 하면 다이알비누의 냄새가 딱 떠오른다. 억지로 향기를 입힌 게 아닌, 정말 딱 비누로서의 냄새만 나는 이 정직함이 마음에 들어 다이알 비누를 좋아한다. 향기가 덧입혀진 비누의 냄새는 내게 '비누 냄새'가 아니니까... 이제 막 뜯어서 그런지 욕실에서 풍겨나오는 다이알비누 냄새가 여기 방 안에서도 난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지? 깊고도 진한 그 냄새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아마 내가 다이알비누를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비누를 많이 사 놓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비누를 쓰는 동안은 마음도 내내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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