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쟁이의 다락방

 

 

 

내가 저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기업의 사보 인터뷰를 읽고서였다. 평소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분야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명리학과 관련된 콘텐츠를 눈여겨 읽곤 했는데, 저자의 인터뷰 내용은 내가 알고 있던 일반적인 명리학 연구가들이 말하는 것과는 좀 달랐다. 분명 명리학적인 내용을 말하는데 그걸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설명해서 읽는 이가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용한 힘이 있었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찾아보니 '예스인터뷰'에 올라온 저자의 인터뷰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런 팔자라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건 제가 창안한 건 아닌데, 첫째, 적선(積善)을 많이 해야 해요. 그래야 자기 마음이 밝아집니다. 둘째, 독서를 해야 합니다. 기질을 변화시키는 길은 학문하고, 독서를 많이 해야 합니다. 셋째, 명상을 해야 합니다. 하루 시간의 10분의 1은 자기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바쳐야 해요. 십일조죠. 넷째, 선생을 만나야 합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사람, 인생의 기로에서 중요한 한마디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다섯째, 명당을 찾는 길입니다. 묏자리나 주택. 그런데 요즘은 풍수의 시대가 갔죠. 여섯 째, 사주팔자 공부를 해야 해요. ‘오버’하지 말아야 하는 거죠.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사주와 팔자만 따지는 게 아니라 현대인도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부, 독서, 기도, 멘토링 등의 방법을 이야기하니 누가 이걸 사주명리학 연구가의 말이라 하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저자가 하는 말에 좀 더 신뢰를 갖게 되었고, 저자의 신간이 나오면 찾아 읽게 되었다.

 

 

저자는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강호동양학자, 사주명리학 연구가로 알려져 있다. 미신으로만 여겨지는 사주명리학을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이면서 철학과 인문학으로 대접받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인의 ‘마음의 행로行路’, 즉 먼 과거에서 시작해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여행을 통해 경험하고 실천함으로써 이치를 궁구하고, 마침내 무한한 대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그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조용헌의 사찰기행》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방외지사》 《조용헌의 고수기행》 《동양학을 읽는 월요일》 《조용헌의 휴휴명당》 《동양학을 읽는 아침》 등이 있다. 현재 〈조선일보〉 칼럼 ‘조용헌 살롱’을 2004년부터 14년 넘게 연재중이이기도 하다.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간결해서 오히려 임팩트 읽게 읽힌다.

이번의 신간 <조용헌의 영지순례>는 전국의 이름난 영지에 대한 내용이다. 전국에서 실력을 인정 받는 사주명리학 연구가나 도사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영지가 어딘지, 그곳이 왜 영지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용이 재미 없거나 지루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자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설명도 이전의 저서에서와 같이 친절히 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사진이 화보급이다. 종이의 질도 다른 책에 비해 좋고 두꺼워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데, 이렇게 큰 사이즈의 책에 두 페이지에 걸친 전경 사진이 많아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이렇게 사진을 통해서 영지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진들을 보니 대부분의 영지는 경관이 좋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리는 곳이었는데,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없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절경으로 유명한 곳을 이렇게 큰 사진으로 볼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반쯤은 여행을 다녀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만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소석 구지회님의 그림과 짧은 글이 실려 있는데 각각이 작품이라 이 부분을 보는 재미도 컸다.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진 사주명리학적인 내용과 함께 장대한 스케일의 사진과 예술작품과 다를 바 없는 그림까지 실려 있으니 추천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책에 소개된 영지를 언제 가 볼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바위산을 보면 올라가 앉아있고 싶어질 것 같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강물의 흐름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 그저 조용히 강물을 내려다 보게 될 것 같다. 길을 걸을 때 땅의 기운이 느껴지는지 내 몸의 반응에 좀 더 예민하게 주목할 것도 같다.

자연의 이치가 궁금하다면, 복잡한 현대 사회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자연스럽게 날리고 싶다면, 그래서 평온한 마음과 몸을 유지하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텍스트를 읽지 않아도 그저 사진과 그림만 훌훌 넘겨 보아도 얻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블랙커피원샷

 

이 책의 소개글을 보고 단번에 떠오른 것은 호프 자런이 쓴 '랩 걸'이었다. 학자로서의 치열한 삶과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즐거움, 그리고 학문에 쏟는 열정을 자세하게 보여준 책이었다. 두께가 꽤 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학자로서의 순수한 열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빠져 앉은 자리에서 정신없이 독파했기에 열정의 전염성을 믿게 되기도 했다.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라는 이 책 역시 기린과 함께한 군지 메구라는 과학자의 열정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린을 유독 좋아했던 소녀 군지 메구가 18세에 평생 기린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한 뒤 기린 박사가 될 때까지의 기록을 담은 치열한 성장의 기록이다. 

군지 메구가 '기린의 제1흉추가 8번째 목뼈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 논문으로 제7회 일본학술진흥회 이큐시상을 수상한 만큼, 기린에 대한 해부학적 정보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보다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고 해서 이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다는 말을 미리 하고 싶고, 오히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기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무언가에 몰입하는 경험에 대해 동경하게 될 거라는 말도 미리 하고 싶다.

 

이 책의 감수자는 '지식은 일상을 풍성하게 만들고 익숙한 것에 가치를 부여해 새로운 깨달음을 낳게 함으로써 일상을 빛나게 해 줍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동의하는 내용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자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10년 동안 30여 마리의 기린을 해부하며 기린의 8번째 목뼈 여부를 연구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기린의 사체가 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사체를 가지러 가고, 연구 주제의 해답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문에 대한 저자의 열정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학문을 하면서 저자가 느끼는 즐거움도 고스란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면 저렇게 끈기 있게 매달릴 수 있고 결국 찾기 원하던 바로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우주 물리학자로부터 '아인슈타인은 수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성공의 비결을 하나만 꼽으라 한다면 쭉 아이의 마음을 한 채 살았다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나도 군지씨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채 어른이 되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 생각한 내용을 적은 부분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겠다거나 이 세상을 구할 연구를 하겠다는 고상한 뜻을 품고서 연구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 그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였다. 내 인생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틀림없이 앞으로 노력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은 분명히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채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과 저자가 말한 '어린아이의 마음'이야말로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 지금 현재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하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루하루 그런 삶을 산다면 그 인생에 대해 성공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을 때마다 '기린이 죽지 않는다면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책을 읽는 것이 재미있었고, 이토록 몰입할 무언가를 찾은 것만으로도 그녀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인 부분 또 하나는, 저자가 지식을 익히는 즐거움과 위대함을 배운 것이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이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전업주부로 살면서 문화센터에서 향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해 저자가 기린 연구자로 성장한 15년 동안 향 만들기에 대해 공부해 지금은 조향사로 강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을 통해서 누군가 억지로 지식을 쑤셔 넣는 공부와 스스로 기꺼이 주체적으로 지식을 얻는 학문의 차이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연구자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기반을 다져준 사람은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저자의 어머니처럼 학문을 생활에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이유를 또 하나 얻었다. 

 

저자의 연구 주제와 연구 방법에 대해 아는 것이 이 책의 중심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 책에는 기린의 해부학적인 지식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렇게 그림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아무래도 번역서다 보니 문장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는데 그림을 참고하니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각 장의 마지막에 '재밌는 읽을거리'라는 부분이 있는데, 기린이라는 이름의 유래, 동물원에서 기린 종을 나누는 법과 같이 정보적인 내용도 있어 흥미있게 읽었다. 나중에 동물원에 가면 기린 몸의 무늬를 유심히 보게 될 것 같고 기린의 뿔이 몇 개인지도 관찰하게 될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거나 길을 개척해 주길 기다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힘들다며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갈 수밖에 없다.' 하는 각오를 다진 것이 연구자로서의 시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이 학문의 즐거움과 열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이전 단계로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가 먼저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을 한다면 즐거움도 얻고, 열정과 용기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저자처럼 말이다.

 

Posted by 블랙커피원샷

 

 

책을 받고 깜짝 놀랐다. 표지가 온통 꽃천지였다. 흔히들 말하는 몸빼, 시골 할머니들의 일바지 원단과 다를 바가 전혀 없어 보였다. 이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줄지는 몰랐다. 그런데 계속 보고 있으려니 좋았다.

 

 

정말 원단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어서 띠지를 벗기고 손으로 표지 앞 뒤를 쓸어보기까지 했다. 바탕색이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남색이라, 표지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길 이유가 충분했다.

 

 

표지를 넘기자 속지가 나왔는데 이것도 역시 꽃천지... 두 가지 색상의 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꽃밭이었다. 분위기는 표지와 확연히 달랐지만 속지는 속지대로 부드럽고 은은하게 예뻤다. 아직 내용은 읽지도 않았는데 이미 마음이 반 넘게 넘어가버렸다. '이건... 반칙이야...' 하는 중얼거림이 저절로 나왔다.

 

 

차례에서도 챕터별로 색을 다 달리 사용해서 구분을 짓고 있었다. 네 가지 색 모두 눈에 잘 들어오면서 튀지 않고 조화로워서 좋았다. 새 책을 읽을 때 디자인을 맡은 회사를 눈여겨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이 책은 예외다. 기억해 둘 생각이다. 

 

 

이 책은 맛집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보니 맛에 대한 이야기지만 객관적이고 묘사적이지 않고 다분히 주관적이고 서사적이다. 저자는 '들어가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작고 허름하고 낮게 엎드린 동네 식당들, 그 식당들을 오래 지킨 사람들, 그 사람들이 켜켜이 쌓아온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듣고 기록하고 나누는 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그 소사가 저에게는 대사였습니다. '할머니 식당'은 제게 우주입니다.'

그렇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각지에서 작고 허름한 식당을 운영하는 많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구성으로 실려있다. 겉모양만 봐서는 선뜻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는, 간판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그런 식당을 운영해서 자식들을 다 공부시키고 가족들을 건사한, 그 험난한 이야기들... 이 책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지도 않고, 손님이 너무 많이 오는 게 오히려 걱정되고, 마음에 맞는 손에게는 뭐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하신다. 그러고 보면 음식의 진짜 맛은 음식에 있는 게 아니라 그걸 먹는 분위기와 정에 있지 싶다. 전화가 너무 많이 오는 게 싫어서 간판의 전화번호 일부를 일부러 떼었다는 정회식당,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갓냉이동치미를 준다는 갓냉이국수, 신기한 모양의 일미만두, 저자가 책 곳곳에서 언급해서 읽는 내내 그 맛이 궁금했던 삼태기꽈배기 등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맛이나 가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책 내용 중 성원식품 어머니의 말씀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싼 걸 먹는다고 저렴한 사람이 아니야. 사람마다 가치가 있어." 이 책 곳곳엔 철학자의 명언 같은 할머니들의 말씀과 정신이 나타나 있는데, 모두 수십 년간의 노동으로 입증된 것들이어서 그런지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노동의 신성함이 담보된 말씀이니... 어쩌면 저자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이 많은 음식점들을 다닌 게 아니라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고파서 다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 하나하나가 정감이 있었다.

다른 사진들은 큼직하게 컬러로 실어놓으면서 주소, 전화번호, 영업시간, 메뉴 등 가게의 정보가 나와있는 'MEMO' 페이지는 사진도 글씨도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어서 뜻밖이었다. 알려는 주되 잘 알아볼 수 있게 알려주지는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인가 하는 의심이 들어 이게 광고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맨뒤 찾아보기 페이지에 지역별 할머니 식당에 대한 간단한 정보가 따로 나와있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웠는지...
이 혼돈의 코로나 시대가 종식되어 다시 이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때가 오면 이 책에 실린 할머니 식당들에 찾아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물씬 들었다. 저자처럼 곰살맞게 구는 성격이 못 되는 내게도 할머니들이 따뜻한 정을 베풀어주실지 정말 궁금하다. 그때까지 할머니들 모두 건강하시면 좋겠고, 계량이 필요 없는 그 손맛도 여전하면 좋겠다.
위로가 필요한 때에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제대로 된 책을 만나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Posted by 블랙커피원샷

10월 마지막 주 아이가 학교에서 단체로 소변검사를 했었는데, 원격수업 중이던 지난 주 담임교사로부터 문자가 왔다. 단백뇨가 의심되니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고 회신서를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이와 관련되어 조금이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부터 쿵~ 내려앉는 나... 세월이 흘러도 적응되지 않는 일...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딸의 단백뇨를 치료하느라 마음 고생하는 분도 봤기에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검사를 의뢰할 병원 1순위로 떠오른 곳은 똘똘이 스머프 같은 눈빛을 가진 반백의 의사선생님이 진료 하는 가정의학과였다. 이 동네에 이사 오기 전부터 동네 토박이분으로부터 추천 받은 병원이었는데, 아이가 아파 갔던 첫진료 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의료보험이 가장 잘 되어 있는 나라라 병원은 돈을 많이 못 벌어도 국민 입장에서는 비용이 얼마 안 드니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에 오라는 솔직한 말씀으로 내 긴장을 무장해제시킨 의사선생님 덕분에 아이의 고정 병원으로 삼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아이가 얼굴이 반쪽이 되어가고 있었고, 퇴근하자마자 아이와 만나서 가느라 병원 문닫기 직전에 진료를 받은 날이었다. 긴장과 피로가 아마 아이와 내 얼굴에 묻어 있었을 것이다. 의사선생님은 예의 그 똘망똘망한(어른이신데 이렇게 표현해서 죄송...) 눈빛과 소년같은 미소를 발사하며 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니 국민으로서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며 수치까지 자세히 인용하셨고, 아이에게 앞으로 아프면 혼자라도 병원에 오라는 말씀으로 끝맺으셨다. 팩트와 유머가 잘 버무러져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 그분 특유의 표현방식 때문에 나도 모르게 빵~ 웃음이 터졌고, 아이뿐 아니라 나도 재미있으면서 다정한 위로를 받은 날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스포츠에도 일가견이 있는 실력 있는 분이셨다. 그 후 아이가 아파서 갈 때마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말아라, 그러나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며 시크한 큰 형님처럼 위로를 해주셨고, 결정적으로 작년 아이가 위급했을 때 큰 사안이었는데도 응급처치를 바로 잘 해 주신 덕분에 아이의 고생을 덜 수 있었다. 겨울방학을 하자마자 다시 수술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결과, 그 때 처치가 잘 돼서 재발 여부만 관찰하면 된다고 했다. 똘똘이 스머프 의사선생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다시 아이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생각만 해도, 으... 올해 초 독감 확진을 받았던 곳도 그 가정의학과여서, 그 때 의사선생님께 대학병원에서의 진료 결과를 말씀드리고 고개 숙여 감사를 드렸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생 의사선생님으로 이정길소아과 선생님을 꼽는데, 똘똘이 스머프 의사선생님은, 멀리 이사 와서 아이가 더이상 이정길선생님께 진료 받지 못 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정길선생님의 변신버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믿음이 간다. 두 분 다 평소 잘 웃고 농담을 하는 분이 아닌 것 같은데, 내 아이가 진료실에 들어서면 "우리 **이 왔니?" 하면서 활짝 웃어주신다. 아이와 나의 두려움과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진료하는 내내 이 얘기, 저 얘기 유머 섞어 해 주시는 것도 두 의사선생님의 공통점이다. 이러니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치유해주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믿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담임교사의 문자를 받고 바로 가정의학과에 문의해 보니 단백뇨 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이번 주 월요일에 소변검사를 했고, 그 결과가 나오는 날이 어제였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찌나 불안하던지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똘똘이 스머프 의사선생님께서는 우리를 보자마자 "괜찮은데요!?!?" 하며 활짝 웃으셨다.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니 앞으로 주기적으로 검사만 하면 된다고 했다. 웃으면서 그렇게 말씀한 후, 아이를 향해 "요즘 스트레스가 많지? 그래도 죽을 만큼 공부해야 돼~ 아니, 그렇다고 진짜 죽으면 안 되고..." 하셔서 이번엔 내가 웃음이 터졌다는... 의사선생님이 자신의 스트레스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아 잠시 숙연했던 아이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선생님의 가장 효과적인 처방은 웃음...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병원에 갈 때에는 하늘도, 가로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따로 식이요법을 할 필요도 없다고 해서 아이가 먹고 싶다는 샌드위치를 사서 달랑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천이 가로수라는 것도, 하늘이 티 없이 푸르다는 것도 눈에 잘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새 날, 오늘... 불안이 100% 가신 건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를 또 충실히 살았다. 앞으로도 우리 앞에 문제는 주어질 것이고 해결할 수 있는 길 또한 펼쳐질 것이다, 어제처럼... 그 믿음을 가지고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려고 한다.



Posted by 블랙커피원샷

숲의 나라, 독일의 뮌헨 대학에서 7년 반을 유학한 덕에 초록이 주는 힘을 굳게 믿으며,

그에 기대어 근근이 살아가고자 하는 기생형 인간이기도 합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우연히 찾게 된 대관령에서 여름 두 달을 보내며 생활여행의 새로운 챕터를 열게 되면서,

여행이라는 작은 삶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여행자로서 보냈던 시간을 되돌아보며

 『기꺼이, 이방인』을 엮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든 책 소개 글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말미암아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되면서취미인 '여행기 읽기'에서 큰 위안을 받고 있던 중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두 달을 산 이야기라니... 나 역시 낯선 골목길 걷기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책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이 다 낯선 것들이니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게 되는 게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이다. 속속들이 자세한 요소들을 알 수 없으니 그저 보이는 만큼만 보며 만족하는 게 이방인의 생활이기도 하다. 이런 생활 방식은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 아니, 몇 안 되는 단점까지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조금 불편한 점이 있어도 그 낯섦의 새로움에 감탄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넘기게 되니까...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점들 때문에 기꺼이 이방인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점에서 저자와 나는 찌찌뽕이다~

 표지를 보았을 때에는 약간 실망했다. 나는 작년 5월 대관령에 다녀온 적이 있다. 시야가 탁 트인 대관령의 광활한 전경과 머리칼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세차고도 시원한 바람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왜 이 멋진 대관령의 경치를 흐릿하게 처리했을까?', '배추밭을 비롯한 초원의 초록빛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책에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치를 묘사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사진으로라도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정말 컸다. 사진이 없다면 그렇게 발행한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그 이유를 헤아려보고 싶지 않을 만큼 경치에 대해 욕심이 나는 곳이었나 보다, 내게 대관령은... 그러니 저자도 매혹 당해 두 달 살이를 하게 되고 책까지 내게 되지 않았을까?

 약간 노르스름하고 손에 닿는 감촉이 까슬까슬해 넘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종이의 질, 적당히 큰 사이즈라 여러 번 되읽고 싶게 만드는 크기의 활자, 민트색 속지까지도 마음에 쏙 들었는데... 

 '지금 여기서 충분히 행복할 것'이라는 저자의 말부터 마음에 들었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어딜 가더라도 그 곳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만약 그 곳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건 그럴 만한 충분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을 테니까... 순간순간의 소소한 행복을 다 누리겠다는 저자의 적극적인 태도가 나를 빠르게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겼다. 

 저자소개와 '들어가며'를 읽고 나니 문득 저자가 궁금해졌다. 앞부분에 소개된 내용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져 버린 것... 요만큼 읽었을 뿐인데 '도대체 누구지? 누군데 이렇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하는 생각에 참을 수 없어져 버린 것이다. 친절한 인터넷 검색의 세계는 내게 저자의 얼굴까지 보여주었다. 내가 예상하던, 예민하고 까칠한 인상이 아니어서 뜻밖이었다. 저자는 '대충 잘 살자.'는 문장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대충대충'이 안 되는 사람인데... 너무 순한 인상이었다...@@

 한 장 두 장 읽다 보니 이 책은 여정에 따른 장소에 대한 정보, 감상 등을 적은 '여행기'가 아니라 그냥 저자의 '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관령에서 사는 두 달 동안의 일기... 누군가의 일기를 읽고 나면 그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 이야기 한 번 나눠 본 적 없어도 그 사람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게 일기의 매력이지... 그래서 나도 저자와 일면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생활을 같이 해야 할 수 있는 사항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렇게 저자에 대해 알고 보니 나와 참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끝내는 공감하는 부분마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게 되었다는... 어떤 페이지는 내가 쓴 게 아닐까 싶게 모든 내용을 다 밑줄 긋고 싶기도 했다. 특히 '생래적 프로불편러를 응원하며'와 '같이 놀아야 제맛', '대관령 북캉스'는 200% 공감하는 내용이라 읽고 또 읽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 지구에 나말고 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쁨, 이방인의 마음으로 사는 일상의 참신함을 아는 저자를 만나 이 책을 읽는 내내 참 마음이 시원했다. 마치 저자와 직접 만나 차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들은 느낌... 아니, 저자가 아니라 오랜 친구와 만나 잔잔하지만 편안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눈 느낌...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공감 받고 위로 받은 느낌. 책을 읽고 이런 느낌을 받는 게 참 오랜만이라 여운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아 조만간 다시 이 책을 잡게 될 것 같다.

 이 책의 '차례' 바로 뒤에 실려 있는 지도에서도 다른 여행책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름을 찾을 수 있다. 저자는 대관령에서 두 달을 사는 동안 대관령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강원도 전반을 돌아다녔다, 마치 현지인이 일상을 사는 것처럼... 저자가 다녔다는 곳들이 내게도 생소한 것을 보면 유명한 관광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책 내용을 다 읽은 후 다시 지도를 보니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다정한 곳들인 것 같아 나도 가 보고 싶어졌다. 이런 것이 저자의 글이 가지고 있는 '조곤조곤'의 힘이겠지... '에필로그'를 보니 저자는 올해 대관령 두 번째 여름살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용기에 응원을 보내며, 이 책을 통해 나도 이방인의 마음으로 타지에서 일상을 보낼 용기를 얻었음을 저자에게 감사하고 싶다.

삶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블랙커피원샷